북한의 중견 작가 홍석중씨(63)가 재작년 발표해 평양의 독서계를 석권하고 있는 장편소설 ‘황진이’(평양 문학예술출판사)가 북한에서 직수입돼 이번 주부터 서점가에 깔린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1888∼1968년) 선생의 손자이자 국어학자 홍기문의 아들인 홍석중은 첫 장편 ‘높새바람’이 지난 1993년 남쪽에서도 출간되어 일반 독자는 물론 문인 사이에서도 정평을 얻었다. 할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임꺽정’의 마지막 대목을 손질한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남쪽에 소개된 북쪽 작가 치고 다른 작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번번히 소개되는 어엿한 인기작가다.
소설 ‘황진이’는 북한 소설에서는 보기드문 거침없는 표현과 에로틱한 묘사로 더욱 눈길을 잡아챈다. “한줄기의 가느다란 불길이,뜨겁고 짜릿한 것이 진이의 온 몸을 바늘처럼 찌르며 흘러갔다. 진이는 야릇한 충동에 사로잡혀 구레나룻이 텁수룩한 놈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놈이는 갑자기 얼음물을 뒤집어 쓴 사람처럼 흐느끼며 어린애마냥 와락 진이의 품속에 안겨 들었다.”
“진이는 달빛 속에 누워있었다. 굳은살이 박힌 놈이의 거친 손이 그의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진이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입에서 신음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문득 가슴이 무거워졌다.”
1편 ‘초혼’,2편 ‘송도 삼절’,3편 ‘달빛속에 촉혼은 운다’로 구성된 ‘황진이’는 528쪽의 방대한 분량에 컬러 삽화 9장이 작가의 사실주의적 작법을 더욱 돋우어 낸다. 하지만 줄거리는 흔히 알려진 서경덕과는 황진이의 그 유명한 러브 스토리가 아니다. 홍석중은 오히려 조선시대의 사대부의 입을 통해 전승되었을 법한 기존의 스토리 라인을 허물고 화척 출신인 가공인물 ‘놈이’를 내세워 기생 황진이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스물 두살치고는 거쿨진 몸집에다가 사납게 치째진 갈고리눈에는 살기에 가까운 위엄과 소름 끼치는 찬웃음이 서려 있어서 고추 상투를 매단 늙은이들도 그가 총각이라고 마구 하대를 하지 못했다.”
황진이는 양반 계층인 황진사댁의 서출이 낳은 딸로 묘사되고 있다. 그 출생의 비밀을 누설한 사람은 황진이를 짝사랑하던 머슴 ‘놈이’로,윤승지댁과 혼사 문제가 오고가던 황진이는 삶의 의미를 잃고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양반 사대부에 대한 복수심에서 송도의 색주가인 청교방의 기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서 놈이는 결국 양반 사대부의 흉계에 넘어가 효수를 당하고 진이는 놈이의 시체를 묻어준 후 전국을 떠돌며 생을 마감한다.
홍석중은 후기에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황진이가 창도읍에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이후부터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그때 진이의 나이는 갓 30”이라며 “인간은 몇 해를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추억속에 얼마나 깊은 자욱을 남겼는가가 중요한 것이요,그래서 죽음과 함께 비로소 삶이 시작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소설 ‘황진이’는 무엇보다도 질박한 어휘의 사용으로 향후 남북의 문화적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다가 1948년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가는 할아버지를 따라 월북한 홍석중은 이번 소설에서 ‘장맞이’라든가 ‘깨끔내기’ 등 염상섭의 작품에나 나옴직한 서울의 어휘들을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 반면 ‘집난이’(출가한 여자),‘난바다(먼바다) 등 남쪽의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어휘들도 고루 섞여 있다.
문학평론가 김재용씨는 “서울의 표준어와 평양의 문화어 어휘들이 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기억을 통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자 남북의 통합에서도 범상한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소설 ‘황진이’를 들여온 통일문학사의 강만식 주간은 “북한에 남아있는 재고 1440부 전량을 수입했다”며 “매년 충북 괴산에서 열리는 벽초 홍명희 문학제에 손자인 홍석중씨가 참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철훈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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